신앙은 행함으로 입증됩니다.(요3:16-21)


공회원 중 하나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는 바를 본 후 하나님으로부터 온 '랍비'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질 하나님 나라


니고데모가 예수께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의 내용을 미리 알고 그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답했습니다(3:5-7).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니고데모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궁금했던 것은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가 언제 와서 로마의 압정으로부터 백성을 해방시킨 후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울 것인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그에게 새롭게 소개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선민도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소개한 하나님 나라는 다윗 왕국과 완전히 다릅니다. 이스라엘이나 다윗 왕국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인간이 통치하는 이방 나라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신약시대 이후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의해 통치될 것입니다.


육으로 태어남으로 선민은 다윗 왕국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나야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 받아야 할 중요한 이유입니다. 구원은 구속 또는 중생의 결과 또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구원(구속)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구약이 모형과 상징을 통해 예언하고 약속한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의해 곧 세워질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구약 시대 다윗 왕국이나 이스라엘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질 하나님 나라를 더욱 더 소망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를 예수님은 점차적으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허락하는 거듭남은 물과 영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벧전1:23)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 대화는 구원의 다양한 측면들을 설명합니다. 구원은 구속의 결과이며 본문에서 거듭남으로 설명됩니다. 거듭남(영적 출생)은 하나님의 자녀(1:12-13)와 하나님 나라의 시민(3:5)이라는 신분들을 얻게 합니다. 이 덕분에 영으로 난 자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총체적으로 설명된 구원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예수님은 유명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계시했습니다(3:16). 이 성구는 요3:1-21절로 구성된 문단에 속하는 한 구절에 지나지 않습니다. 16절은 주로 구원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러나 문맥에 따르면 당연히 16절의 배경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구원, 중생, 구속과 영생이라는 개념들을 하나님 나라와 연결시켜 설명합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 단어들 보다 상위 개념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이 단어들이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됩니다.


.구원은 누가 받는가?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3:16-18). 믿음은 구원을 얻게 하는 수단이며 방법입니다. 여기 믿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알고, 앞으로 올 메시아에 의한 성취될 구속 은총이 필요한 것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은 후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을 무엇보다 먼저 마음으로 믿는 것을 뜻합니다(10:9-10) .


이런 믿음의 소유자는 진리에 따라 행합니다. 자연스럽게 생명의 빛 안에 거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빛의 완전한 결여가 바로 어둠입니다. 불신자는 자연스럽게 빛 밖 즉 어둠 안에 거합니다.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왔지만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요일1:5-7절에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결국 구원의 이유와 목적은 구원의 결과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신자들이 신분에 맞춰 빛 가운데 살고 행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기독교 윤리를 늘 요구합니다. 존재와 신분에 맞는 삶과 행위를 위해서입니다. 새로운 존재와 신분이 없다면 새로운 기독교 윤리(또는 율법)도 의미를 잃습니다. 성경의 율법(또는 기독교 윤리)은 구원 받은 후 삶과 행함을 돕는 하나님의 방법과 수단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는 윤리적 행위(사랑)로 구원(믿음)의 여부를 판단함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의 은총을 설명해 줌으로 새 신분에 맞춰 살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율법주의자는 원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하지만 진실한 신앙인은 사랑으로 세워주기를 더 좋아합니다. 교회와 신자는 신앙 고백자를 형제로 보고 사랑할 의무만 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구원 이후 어떻게 구원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양하게 그리고 풍성하게 설교해야 합니다. 값싼 구원과 복음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어차피 누가 진정 구원 받은 자인가는 하나님 이외 누구에게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습니다. 신앙 고백자를 주 안의 형제로 여기고 영적으로 세워주는 신학과 목회가 오늘날 무엇보다 더 필요합니다.


구원은 오로지 믿음으로 받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가르칩니다(2:26). 성경은 믿음에 근거를 둔 행함을 가르칩니다.

행함을 무시한 채 믿음만 주장해서는 목회자와 신자에게 윤리적 삶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죄를 짓고도 믿음을 주장하며 철면피하게 행동합니다. 윤리 또는 선행이 없는 목회자와 신자들은 주변에 참으로 많습니다. 신자가 불신자보다 못합니다. 입만 살아있습니다. 신학적 논쟁보다 삶을 말해야 할 이유입니다.


믿음에 의한 칭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획득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새로운 신분은 영적 거듭남 즉 영적 출생으로 가능합니다. 출생은 생명의 출발 즉 새로운 삶의 시작을 뜻합니다. 새로운 생명은 왕성하여 활동을 통해 성장하고자 합니다. 당연히 선행으로 자신의 중생을 증명합니다(3:5-8).

 

.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인 젖을 먹여 자라도록 신자를 도와야 합니다. 여기 자람은 성화 삶으로 이는 사랑 즉 윤리로 가능합니다. 결국 성화는 칭의가 원인이 된 결과입니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칭의 논쟁에 몰두하고 유아와 같은 초신자를 방치합니다. 이것은 교회에게 자해와 자살 행위이며 출생한 아이를 위해선 살인 행위입니다. 그리고 칭의 논쟁으로 인해 교단과 교파 사이 더욱 많이 분쟁과 분열이 생기고 이 틈을 타서 사이비와 이단들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영적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너무나 좋아할 일을 교회 스스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도 칭의 논쟁은 사실상 불필요합니다. 칭의의 진위는 하나님만 아시고 교회는 알 수 없습니다. 교회는 입술로 한 신앙고백을 듣고 신자로 인정할 뿐입니다. 교회가 할 일은 신자들을 말씀의 젖으로 잘 먹여 성장을 돕는 것뿐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뜨겁게 기도할 것만을 가르칩니다. 구원에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은 비교적 쉽고 간단합니다. 그러나 구원 이후 어떻게 세상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이들 가르침을 설명하려면 세상의 높은 학문도 필요합니다. 신자들은 세상 삶을 살며 오만 가지 사상과 철학을 만납니다. 그것들을 성경적 관점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는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성경의 근본인 모세오경은 애굽에서 왕자 교육을 받은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말리엘 출신 사도 바울이 신약 성경의 약 절반을 기록했습니다(5:34, 22:3). 이 성경들을 정확히 해석하려면 이들과 못지않은 수준의 학문 실력이 요구됩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기록한 모세오경은 역사적 성격이 강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들은 구약 성경과 사복음서들의 신학적 또는 교리적 해석입니다. 그의 서신들은 대단히 논리적입니다. 이들의 성경책들을 해석하려면 역사나 논리에 대한 기본적 이해 즉 인문학적 교양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모세나 바울은 신앙 삶을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또는 통전적으로 기록하고 해석합니다. 같은 방법으로 교회는 성경을 해석하며 설교해야 합니다. 이젠 불필요한 신학적 논쟁을 멈출 때입니다. 갓 출생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젖입니다. 교회는 어떻게 살아서 그가 앞으로 하나님 나라의 합법적 상속자가 될 것인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후 베드로에게 준 목양명령은 첫째 어린양을 먹이라. 둘째 양들을 치라. 셋째 양들도 먹이라입니다(21: 15-18). 어린양만 아니라 다 자란 양들도 계속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어린양들은 성장을 위해 그러나 다 큰 양들은 기독교 윤리에 맞춘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각각 먹어야 합니다. 어린양들의 음식은 연하다면 다 자란 양들의 음식은 단단하다는 차이만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어린양들은 물론 다 자란 양들이 제대로 영적 양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설교함으로 신자들이 심리적 순화는 체험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합니다. 아니면 성경을 부분적으로 가르침으로 겉으론 건강하게 보이지만 영적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교회들은 많은 신자들을 자랑하지만 신자들은 영양 불균형 상태에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성경기록 방식대로 신앙 삶을 다양한 측면에서 통전적으로 설교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신학적 논쟁보다 진정한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는 출생한 아이가 하나님 나라의 정상적 시민으로 자라 그 나라의 일꾼으로 살도록 해야 합니다(2:8-10, 4;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