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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개혁정론' http://www.reformedjr.com/에 한국교회송사연구소 신재철 소장이 기고한 글입니다.

 

. 고려교단의 조직과 발전

 

1. 총회와 노회의 구성

 

대한예수교 장로회 반고소 고려측 제26회 총회가 19761019일에서 1021일 하오 1030분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111번지 소재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목사총대 37, 장로총대 41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총회장에 석원태 목사, 부회장에 이기진 목사, 서기 김태윤 목사, 부서기 서봉택 목사, 회의록서기 오주영 목사, 부회의록 서기 박성호 목사, 회계 지득용 장로, 부회계 박윤섭 장로가 선정되었고, 운영위원으로 위원장 석원태, 서기 김태윤, 회계 지득용, 위원에 이기진, 박성호, 송명규, 서봉덕 목사가 선정되었다.

 

고려신학교 학교법인 이사 및 감사도 선정하였는데 이사장에 김주락, 부이사장 이기진, 서기 최영구, 회계 박윤섭 장로, 이사 손명복, 권성운, 송명규, 석원태, 권성문, 우종선 신양우, 김용효, 박순대, 지득용이 선임되었고, 감사에는 박성호, 조인태가 선임되었다. 교단 기획위원 위원장에는 송명규, 서기 박성호, 회계 이호기, 기획위원에 이기진, 권성주, 김태윤, 서봉덕, 서상동, 지득용, 박윤섭 등이 선정되었다. 또한 반고소측 총회는 선언문 초안 위원으로 석원태, 이기진, 김태윤, 서봉덕, 오주영, 박성호 목사를 선정하여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경남(법통)노회측 지도자들은 경기노회 반고소 목사들과 반고소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연합하여 총회를 조직하였으나, 이듬해인 1977년 수적으로 우세했던 경남법통 노회(마산측) 측 지도자들은 고려신학교와 총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석원태 목사를 신학교에서 물러나게 함으로 갈라섰다.

 

석원태 목사가 신학교에서 쫓겨나가자 재학생 중 일부가 고려신학교 수호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석원태 목사를 복귀시킴으로 결국 반고소 고려 측은 내홍을 겪게 되었고, 석원태 목사를 비롯한 경기노회측과 마산 중심의 경남노회측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석원태 목사를 중심한 반고소 고려 측은 마산 측과 결별할 때 자신들이 주장하는 순수 반고소 운동의 정신을 성명서를 통하여 선포하였다. 그 후 송상석 목사계의 마산 측은 송상석 목사 사후인 1982년 다시 고신측에 흡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되자 반고소 교단은 석원태 목사 중심으로 개편되었고 2013년 말 와해되기까지 석원태 목사는 반고소 고려측의 중심인물로 의무와 책임,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반고소 고려측은 마산 측과 결별한 이후 교세확장을 모색하게 되었고,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가진 제28회 총회(1978. 9. 2627)에서는 타 교단 목사 가입 문호를 개방하기로 하였고 그 구체적 절차는 교단 헌법에 정한대로 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당시 고려신학교의 학생 수는 154(대학부 51, 신학부 103)으로 보고되었으며, 개척교회(설립) 및 가입교회는 50교회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이때 가입한 교회들은 1984년 교단 분열 시 몇 교회만이 남고 다시 고려교단을 떠났다.

 

2. 노회의 발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769월 반고소 고려 총회가 구성될 당시 노회는 기존의 고신교단에서 행정보류를 선언하고 탈퇴한 경기노회와 경남노회(법통), 그리고 부산노회 등 3개 노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977년에 경기노회와 경남노회(법통)가 결별하게 되자, 고려총회는 조직을 정비하여 경기노회, 수도노회, 영남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나름대로 체계를 제대로 갖춘 노회는 경기노회 뿐이었고 여타 노회는 노회의 골격만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 후 영남노회는 경북노회로 개칭되어 경기노회, 수도노회, 경북노회, 부산노회로 존속해 오다가 1980년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호남노회가 조직되었다. 1982921일부터 23일까지 부천성문교회당에서 열린 제32회 총회에서 기존의 경기노회, 경북노회, 수도노회, 호남노회 중 경기노회와 수도노회가 합쳐져 서울남노회(서울 한강 이남지역), 서울북노회(서울 한강 이북지역), 경인노회(인천, 부천, 광명시)로 확장 분할되었다. 그리하여 고려교단은 총회산하에 기존 4개 노회에서 5개 노회로 개편되었다.

 

그 후 1986923()부터 25()까지 열린 제36회 총회에서 경남노회를 설립키로 하여 기존의 서울남노회, 서울북노회, 경인노회, 호남노회, 경북노회에 경남노회가 설립되므로 6개 노회로 확장되었다. 이렇게 하여 고려교단은 총회산하에 6개 노회 체제로 12년을 유지해 오다가 1998922일부터 24일까지 경향교회당에서 가진 제48회 교단총회에서 서울 남노회와 서울 북노회, 경인노회를 각각 2개의 노회로 분할하기로 가결하였다. 이로써 총회 산하 노회는 기존의 6개 노회(서울남, 서울북, 경인, 호남, 경북, 경남)에서 9개 노회(서울남, 중부, 서울북, 서울서, 인천, 경기, 호남, 경남, 경북)로 확장되었다.

 

확장될 당시 서울남노회는 34개 교회, 중부노회는 44개 교회, 서울북노회는 29개 교회, 서울 서노회는 23개 교회, 인천노회는 24개 교회, 경기노회는 26개 교회였다. 그 외 기존의 호남노회는 20개 교회, 경남노회는 15개 교회, 경북노회는 15개 교회로 당시 총회 산하 교회는 도합 230개 교회였다.

 

고려교단이 형성될 당시인 1975년부터 1979년까지의 고려파의 교세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없다. 당시 고려교단의 모교회인 경향교회의 교세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교단에 소속된 교회의 다수가 체계가 잡히지 못한 미조직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교단 가입과 이탈이 빈번했기 때문에 정확한 교세를 산정하기 어렵다. 1980년대에 들어 어느 정도 교단의 체계가 잡혀가고 질서가 세워지면서 교세통계가 기록으로 남게 되었는데 19841231일 당시 고려교단의 교회 수는 104개 교회이며, 세례교인 6,940명을 포함하여 성도수는 23,614명이었다. 그 후 1992년에는 50,533, 1993년에는 65,277명으로 성도의 수가 꾸준히 성장하다가 1995년에는 52,236명으로 감소하였고 1996년에는 58,176명으로 다시 회복세를 보이다가 2000년도에는 72,108명으로 비로써 교세가 7만 명을 넘었다. 이 숫자는 고려교단이 해외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설립한 교회에 모인 성도수를 포함한 것이다.

 

이처럼 고려교단은 총회 산하에 노회가 분할 확장되며 성도수에 있어서도 꾸준한 증가세를 보여 왔다. 그러나 20014월에 있었던 교단 분열로 교회수가 60개 이상 감소하고 성도 수에 있어서도 13천명 이상 격감되었다. 2013년에는 국내 44313명 해외 23718명으로 합 68031명으로 2000년도보다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2001년 분열 이후 교세회복에 어려움을 보인 것을 반증한다.

 

고려교단이 형성된 1970년대를 설립기라고 한다면 1980년대는 정착기라고 할 수 있고, 1990년대는 성장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2000년대는 분열 및 재정비기로 2010년대는 쇠퇴 및 고신교단과 합동기를 정리할 수 있다.

 

3. 고려 교단과 석원태 목사의 역할

 

1975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려교단이 형성 될 무렵 교단의 내 외형적 모습이 질서가 잡히기까지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1976년 제26회 총회에서 석원태 목사가 총회장이 된 이후 교단 내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석 목사는 1975년 경기노회를 조직하여 반고소를 지향하는 고려교단이 출범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부총회장, 혹은 총회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어떤 때는 총회 임원이 아니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총회뿐만 아니라 노회와 지 교회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지도력을 행사해왔다.

 

석 목사가 교단 내에서 이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보조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은 김태윤 목사였다. 그는 1977년 제27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잠깐 총회 일을 하다가 그 후 교단 총무, 서기 등으로 봉사하였고, 34회 총회(1984)에서는 부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김태윤 목사는 고려 총회가 어느 정도 안정된 제36회 총회(1986)시에는 총회장으로 피선되었고, 1992년 이후에는 무려 5년 간 연속하여 총회장을 역임하면서 교단의 일을 주도해왔다. 김태윤 목사가 이렇게 장기간 총회장 역을 감당한 데에는 석원태 목사의 막강한 영향력이 작용하였고 조석연 목사의 역할도 배제할 수 없었다.

 

조석연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인천 석남제일교회(현재 선두교회)1992년 당시 재적교인이 2,000명이 넘고 출석수는 1,200명이 넘어 사실상 고려교단에 소속된 교회 중 최대의 교세를 지닌 교회였다. 당시 재정적인 면에서는 교단 내에서 석원태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경향교회 다음이었다. 석 목사는 이런 조 목사를 제34회 총회(1984)에서 교단 총무로 피선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후 조 목사는 3년간의 총무사역을 감당한 후 제38회 총회(1988)에는 부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런 조 목사를 석원태 목사는 제40회 총회(1990)시에는 총회장이 되도록 지원하였다. 조 목사는 1990년부터 1991년까지 2년 동안 총회장으로 교단의 일을 감당하였다.

 

조석연 목사는 앞의 김태윤 목사나 다른 임원들과는 달리 교단 헌법이 정한 총회장의 권한을 행사했고, 교단에서 막강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석 목사와 의견이 다를 경우에도 소신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 목사가 총회장으로 재직할 당시 석 목사는 조석연 목사가 총회장이 되고 난 후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자주 공 사석에서 평했다. 결국 이런 조 목사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교단 일을 관철하기가 힘든 것으로 판단한 석원태 목사는 2년 임기로 제한된 총회장의 임기를 연장하는 헌법 개정을 통해 김태윤 목사를 5년 동안이나 총회장 자리에 있도록 하고 교단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갔다. 이때부터 교단 내에서는 총회장의 실질적 권한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교단 내 불만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와 같은 특정인 중심의 교단 행정체계는 마침내 20004월 교단 개혁안이 제기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석원태 목사는 제47회 총회(1997)5년 동안 총회장직을 수행해 왔던 김태윤 목사가 담임하던 서울북교회가 부흥하지 않고 개척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교회에서마저 사임하게 되자 교단에서도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석 목사 자신이 다시 전면에 나서서 총회장이 되었고 1998년까지 2년 동안 총회장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제49회 총회(1999)시 석원태 목사는 교단이 어느 정도 성장하여 자리를 잡았으므로 후배 지도자를 양성할 때가 되었다고 천명하고, 김태윤, 조석연, 목사가 아닌 제3의 인물인 양문화 목사(전주 서신제일교회)가 총회장이 되도록 배려했다.

 

석원태 목사는 총회 임원 선거 시 교단에 관한 여러 가지 발언을 하면서 특정인에 대한 지지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양 목사가 총회장으로 재직한 것은 2000년까지 2년간이었다. 양 목사는 고려교단 내에서 비교적 신선한 인물로써 총회장이 되었다고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총회장이 되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나는 허수아비 총회장이고 아무 것도 결정 할 수 없다.”라고 가까운 목사들에게 말했을 만큼 사실상 석 목사가 총회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인 중심의 교단의 행정체계는 건실하고도 합리적인 교회발전을 기할 수 없다는 반성과 함께 개혁의 요구가 높아졌다. 심지어 석 목사의 2선 후퇴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석 목사를 중심한 교권주의자들은 표면적으로는 석원태 목사의 2선 후퇴를 포함한 교단 개혁안을 수용한다고 천명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개혁가담자를 교단 전복 세력으로 규정하는 등 교단이 한 개인의 의지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일인 중심의 교단으로 심화되었다. 이 점은 고려교단의 특징이자 한계였다.

 

4. 고려신학교와 그 이후의 신학교육

 

19751027일 경기노회(고신교단 제24회 총회 결의 제33항인 성도간의 불신 법정 소송 결의가 번복될 때까지 총회와의 행정보류를 선언한 반고소측 노회) 42회에서 고려신학교 복교를 결정하고, 복교 추진위원으로 김주락, 하찬권, 최영구, 석원태(이상 목사), 서환옥, 정채림, 신양우(이상 장로) 제시를 선정하고, 19751125일 복교 추진위원회(상임)가 모여 위원장에 김주락 목사, 서기에 석원태 목사, 회계에 정채림 장로로 결정하였다. 19751125일에는 학교 설립(복교) 이념을 채택하였다.

 

또한 고려신학교 학제를 본과, 전수과 3개년, 전예과 2개년으로 결정하였다(1975. 11. 25). 석원태 목사는 1973415일에 서울에서 자신이 개척한 경향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는데 석 목사는 이 교회를 통해 고려신학교 후원운동을 추진하여 복교된 고려신학교의 재정을 크게 지원하고 계속하여 좋은 강사진을 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자신이 직접 강의에 임하는 등 학교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또한 초기에 고려신학교는 범 교단적인 신학교로 발전 육성시키기 위하여 반고소파 지도자들로 구성되는 이사회를 조직하였다(1976. 3. 10).

 

그러나 경남노회 측과 분리되면서 복교된 고려신학교가 그들의 운영 하에 들어가게 되자 석원태 목사는 크게 실망감을 느꼈고 새롭게 강유중 박사를 교장으로 추대하여 고려신학교를 재정비하였지만 이도 얼마 가지 못하여 고려신학교 운영권 문제로 강유중 박사측과 석원태 목사 측으로 양분되었다. 결국 석원태 목사는 자신이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직접 학제를 관장하고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장로가 재정을 관장하는 것만이 고려신학교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당시 경향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던 정겸효 장립집사를 고려신학교 서무과장으로 발령하고 석 목사 자신이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실제로 고려신학교를 발전시키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곧 고려교단이 성장하는 하나의 동력원이 되었다.

 

19761월 학교 임시교사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0번지에 소재한 영천교회당으로 결정하고 수업을 시작한 고려신학교는 197639일 서울종로구 평창동 11번지에 소재한 삼각산 제일기도원 별관을 구입하여 그 학기부터 그곳에서 수업을 진행하였다. 그후 197949일에 서울 청량리에 소재한 동도교회 교육관을 임차하여 수업을 계속하였으며 198132일에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376-2번지에 소재한 상아탑 학원 2층 일부와 3층을 임차하여 학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다가 19832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53번지에 소재한 경향교회당 교육관을 임시로 임차하여 신림동에 새로운 교사가 완공되기까지 임시 수업하였다. 이때까지는 자 건물을 소유하지 못하여 세칭 보따리 신학교로 불리다가 마침내 198396일 학교 교사를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244-144번지로 신축 이전하였다.

 

고려신학교는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Geneva Academy)를 꿈구며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눌노리 산2번지에 6만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19908월에 교사를 완공하여 마침내 1990913일 전교생이 제2학기 개강예배를 드리고 입소하여 수업을 시작하였고 1991620일 아카데미 캠퍼스 준공감사예배를 드렸다. 이 아카데미 캠퍼스는 고려신학교 캠퍼스와 경향수양관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총회측에서 보면 고려신학교 교사이고, 경향교회측에서 보면 경향수양관인데 건립기금의 상당 부분은 경향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졌다. 경향교회 담임목사로서 현재 고려신학교 교장인 석원태 목사는 자신이 죽기 전에 분명하게 선을 긋겠다고 공적인 모임에서 자주 공언한 바 있으나 아직까지 애매한 상태에 놓여있다.

 

고려신학교 교장 석원태 목사는 강사위주의 교수진은 학교와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임 교수진에 미치지 못한다고 강조하고 전임 강사진 구성을 준비해가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1978년대부터 구체화되었다. 석원태 목사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던 경향교회 내 성도 중에 석사학위 소지자를 발탁하여 고려신학교 대학부의 시간 강사 혹은 전임강사로 채용하였다. 그러나 이 교수들 중 대부분이 교단 내 목회자들이나 신학생들에게 영적인 면이나 학문적인 면에서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고려신학교는 고신교단의 고려신학대학원 졸업기수를 그대로 이어 1977224일 제31회 졸업생으로 신학원 18명 대학부 3명을 배출한 이후 2001222일 제55회 졸업식까지 신학원 721, 대학부 291, 여자신학원 197, 신학예과 106, 1,31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고려신학교 대학부는 고려신학교 교사가 문산 아카데미 캠퍼스로 이전한 이후 제41회 총회(1991. 9. 18-20)의 결의에 따라 1992학년도부터 신학원 2(야간) 및 대학부(교양 및 전공과정)을 폐지하였다.

 

초창기에 고려신학교는 신학교 운영을 위해 각 지교회 월정후원금과 본 노회 산하 남녀교역자의 십일조, 전국의 개인 및 교회, 기타 단체들의 후원금을 받기로 결정하였다(1975. 11. 25). 그 후 19889월에 회집한 38회 총회는 고려신학교를 교단 산하 모든 교회의 직영 체제로 운영하기로 하고 고려신학교 아카데미 캠퍼스 추진위원회를 조직했다. 학교운영을 위해 교단산하 각 지교회가 모든 학교 운영비 확보에 참가하고 교수 생활비와 학교운영비를 전담하기로 했다. 재학생 전원을 특별장학생으로 하여 등록금, 기숙사비, 그리고 식비 일체를 면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하여 교단 산하 모든 교회가 경상비 중 3%를 학교운영을 위해 납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타교단 출신은 특별 장학생에서 제외했다.

 

총회는 각 교회별로 고려신학교 후원회를 조직하여 자발적으로 신학교를 후원하게 하도록 독려했다.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교육 당국에 의해 무인가 신학교 정비정책이 발표되자 고려신학교는 은밀하게 대학인가를 취득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교육부의 인가를 얻지 못했다. 현재의 문산 아카데미 캠퍼스에서도 전문 대학원으로 인가를 받으려고 추진한 적이 있으나, 학교 교사가 고려신학교와 경향수양관으로 공동사용하고 있고 실제로 이 건물을 경향교회가 예배당을 신축하면서 은행에 담보하였으므로 인가를 내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지연 된 형편이어 사실상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신학교 대학부 출신들은 학교의 인가를 간절히 바랬으나 이것이 성사되지 않았고 마침내 대학부는 총회의 결의에 의해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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