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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용근 목사의 목회와 순교

                                                    신재철(초원교회 담임목사, 한국교회송사연구소장, 철학박사)

 

1. 들어가면서

 

일제하에서의 신사참배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논제가 되고 있다. 현재 생존해 있는 대표적인 한국교회사가들인 김영재, 박용규, 이상규 등은 자신들이 저술한 한국교회의 역사서에서 한국에서의 신사참배 강요와 저항 등 신사참배 문제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에 관한 연구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기선,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등과 같은 인물 외에도 신사참배 문제로 신앙을 파수하다가 순교한 이들이 적지 않지만 이들에 대한 관심이 미미하다는 점에서 하는 말이다.

 

 특히 양용근 목사(1905-43)는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했으나 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는 양용근을 순교자의 명단에 포함시켰을 뿐이고, 다른 사가들은 이름조차 거명하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손석태 박사는 양용근의 제자들은 오히려 순교자나 훌륭한 목회자로 역사에 잘 알려져 있지만 “이분에 대해서는 한국의 신학계나 교계에 알려지지 않아서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양용근 목사가 순교자임을 밝힌 진병도는, 손양원 목사의 순교사건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양 목사의 순교사건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양 목사의 순교시기가 일제 말기여서 엄격한 보도통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해방 후 현실문제 해결에 급급한 나머지 일제가 남긴 죄과를 일일이 챙기지 못했고 양 목사의 순교 후 시간이 경과하여 양 목사에 대한 기록의 유실, 인멸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하여 양용근의 순교 사실을 실증적으로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두는 것이 사가의 책임이다. 이런 의미에서 양용근 목사와 그 목회, 그리고 순교에 대해 정리해 두고자 한다.

 

2. 양용근 목사의 삶의 여정

 

1) 가정배경, 교육

양용근은 1905년 10월 14일에 전남 광양시 진월면 오사리 694번지에서 양재훈과 정정랑의 넷째로 출생했다. 양용근의 조부는 양석진, 조모는 김추내로 대를 이어 농사를 짓고 살았으나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는 않았다. 양용근의 맏형은 용이, 둘째가 용운, 셋째가 일환, 다섯째가 우환이다. 양용근의 호적명은 용환인데 집에서는 용군으로 불리다가 목사 안수 후 양용근과 양복근으로 불렸다. 이는 항일투사들이 일본 경찰의 신원조회를 받을 때 피하기 위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진상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광양서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5세에 졸업했다. 17세에는 순천매산학교에서 2년을 수료했다. 당시 이학교의 교장은 구례인 선교사였고, 그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동일하게 그의 영향을 받았던 맏형 용이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일본에서 학원 수강을 통해 거의 독학을 하면서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이런 이면에는 맏형인 양용이의 역할이 컸다. 이국땅에서 둘 다 학업에 매진할 수 없었던 현실에서 형은 동생이라도 제대로 공부를 시켜 가문을 바로 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은 노동판을 전전하여 일을 했고, 동생은 학업에 전념하게 했다. 그리하여 동생 양용근은 20세가 되던 1925년에는 일본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법을 전공하고 25세 때인 1930년 동 대학을 졸업했다.

 

 양용근은 유현덕 여사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양영욱은 중동고 영어교사를 거쳐 숭실대학 교수로 봉직하고 은퇴했다. 차남 양영철은 통역관으로 독일에 거주하고 있다. 장녀 양영숙은 약대를 졸업하고 약사로 살면서 기역약품을 설립 운영했다. 장녀인 그는 부친의 유언을 받고 홀로 된 어머니 유현덕을 모시고 살았다. 2녀 양영자는 목회자와 결혼하여 현재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

 

 순교자 양용근의 아내와 자녀들은 남편과 부친이 순교자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녀들은 부친의 조기 순교로 가족들이 곤궁한 생활을 했지만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부친이 믿은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고 그 신앙을 잘 계승하여 주님의 나라 확장의 일꾼들로 살고 있다. 특히 자손들은 재건파 교회와 고신교회 혹은 합동 측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다. 이는 평소 양용근과 유현덕 사모의 신앙교육과 특히 부친의 순교에서 얻어진 산교육 때문으로 자손들은 말하고 있다.

 

2) 목회자의 길

양용근은 여러 어려운 여건 중에도 고등교육을 받았으나 나라 잃고 사는 동족들의 설움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학업을 마친 후 고향교회로 가서 학당을 운영하기로 하고 ‘오사육영학원’ 개설허가를 신청하고 어렵게 허가를 받았다. 일제는 양용근이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식민지배에 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쉽게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양용근은 주변에서 고등문과 시험에 합격하여 가문과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권유 받았으나 어린 학생들을 신앙으로 지도하면서 기타 학문도 전수하는 등 교육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활이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그는 전공한 법 공부가 현실적으로 사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1934년 늦은 나이에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관동대지진 사건이었다. 양용근은 지진으로 인한 혼란스런 민심을 수습하려는 의도로 ‘한국인에 의한 방화설’을 퍼트린 일본 당국의 정책에 분노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무조건 죽이고 때리는 등 가혹행위를 일삼았다.

 

 그는 형과 함께 기적적으로 살해 현장에서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이런 신앙과 처해진 현실이 신학교에 입문하도록 결심하게 했다. 그의 결단에 대해 가족과 친지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맏형인 양용이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양용이는 동생의 출세가 가문을 세울 것이라 믿었지만 나라 잃은 조국의 현실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일에 실력 있는 동생이 적격이라는 그의 믿음이 결과적으로 동생의 신학입문에 버팀목이 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29세 때인 1935년 평양의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신사참배 문제로 신학교는 폐교되었고, 통신으로 1년 더 공부하고 34세 때인 1939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같은 해인 1939년에 제23회 순천노회에서 라덕환 안덕윤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의 길을 시작했다.

 

3) 그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목회

양용근이 언제부터 신앙생활을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맏형인 양용이가 1920년 6월 전남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에 교회를 세운 것과 양용이가 신학교에 입학한 것을 도운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맏형의 전도로 함께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양용근은 신학교에서 이눌서 교수에게 조직신학을 배웠고 그의 영향을 받았다. 평소 양용근은 형 양용이에게 이눌서 선교사에게 영향 받았음을 술회했다. 이는 양용근의 신학이 이눌서를 통해 정립되었음을 시사한다. 양용근이 자신이 속한 순천노회가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으나 자신은 순교자의 길을 간 것도 이를 입증한다.

 

 양용근은 오사 육영학당 교장으로 일했고(1930-1933), 평양신학교 재학 때인 1936년에는 광양읍교회 조사(1936)로, 1937년에는 여수 애양원교회 조사로, 1939년에는 길두교회에 사무하게 된다. 길두교회로 부임하면서 애양원교회에 손양원을 추천하여 인수인계 했다.

 

 양용근은 1940년에는 구례읍교회로 시무지를 옮겼다. 당대에 양용근과 같은 학문적 기초를 가진 목사는 찾아보기 힘이 들었다. 이런 시기에 양 목사는 한 영혼의 구령과 양육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하나님의 순수한 종으로 살았다.

 

 양용근 목사는 1942년 37세의 나이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복역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943년 12월 5일 광주형무소에서 순교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것이다. 순천노회박해 사건은 양용근의 순교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실제로 순천노회사는 이 당시에 양용근만이 유일한 순교자였음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3. 일제하 순천노회박해사건

 

1) 순천노회와 박해사건의 전개

장로교의 경우 1907년에 독노회가 설립되고 191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선교지 분할정책에 따라 호남지역은 미국남장로교 선교지역이었다. 선교의 결과 전라노회는 1911년 10월 15일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조직되었다. 이 노회는 1917년 전북노회와 전남노회로 분립되었다. 1922년 10월 2일에는 전남노회에서 순천노회가 다시 분립된다.

 

 한국이 일제치하의 국치를 당한 기간 중 교회도 환난과 핍박을 피해 갈 수 없었다. 특히 신사참배 강요는 그러했다. 일본은 중일전쟁(1937-) 후 기독교에 대한 강경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장대로 천황숭배를 거부하는 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40년에는 ‘기독교에 대한 지도방침’을 발표했고 이를 계기로 전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검거하여 일본에 동조하는 기독교로 만들고자 하였다.

 

 일제는 각 노회와 교회에까지 경찰력을 동원하여 압력을 행사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박해에 견디지 못하고 노회와 총회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의례 내지는 국가의식’이라고 하여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에 대항하여 거부하는 사람들과 교회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순천노회에 소속된 목회자들을 전원 구속하여 재판을 받게 하고 실형을 선고한 사건이 순천노회 사건이다.

 

 

2) 순천노회 박해사건과 양용근

순천노회 사건은 노회원 전원이 구속 되고 전원이 실형을 선고받고 전원이 복역을 한 특별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제의 민족 탄압과 교회 말살 정책의 전형적인 사건이다. 그럼에도 자료의 빈곤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순천노회 50년』(1972)과 김춘배의 『한국기독교 수난사화』(1979), 김수진, 한인수의 『한국기독교회사(호남편)』(1980)에서 사건의 윤곽을 어렴풋이 전해주고 있다. 그 후 1992년에 김승태가 “한국 1940년대 일제의 종교탄압과 한국교회의 대응- 전남 순천노회 박해사건을 중심으로-”를 「복음과 상황」 1992년 7,8월호와 9월호에 발표하여 그 자세한 정황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논문은 그가 찾아낸 ‘판결문’의 분석을 통하여 순천노회 사건의 교회사적 의의를 제시한 것이다.

 

 순천노회 사건으로 15인이 구속되었으나 이들은 특별히 구속될만한 일을 한 일이 없었다. 사실 순천노회는 이 구속 사건에 앞서 1938년 4월 25일 구례읍교회에서 제22회 정기노회를 가졌다. 순천노회 사건으로 구속된 오석주, 김상두, 김순배가 특별위원으로 국기게양, 황거요배, 신사참배 등을 결의하는 현장에 있었다. 이때 순천노회는 각 교회에 공문을 발송하여 신사참배를 지도할 것까지 결의한 바 있다. 비록 결의는 했지만 순천노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한 총회에 총대파송을 하지 않았다. 당시 26개 노회 중 순천노회가 유일했다.

 

 총회는 순천노회가 총대를 파송하지 않은 일에 대해 함구했다. 이미 총회는 신사참배 가결대로 충실하게 신사참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노회의 전 노회원이 구속수감을 당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신사참배를 가결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반대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한 위원회 보고문을 보면 ‘구속, 고문, 혹은 죽음의 위협 아래에서 말한 한국인의 의사 표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 말할 때 들어보면 그들은 우상숭배에 대하여 우리보다도 철저한 반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만약에 그들이 노회에서 결의한대로 신사참배를 잘 이행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굳이 그들 전부를 구속수감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일제의 신사참배와 기독교의 우상숭배 거부는 당초부터 평행을 긋는 사상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현실적으로 갈등국면에 도달하기 마련이었다.

 

 주명준은 순천노회의 지도자인 박용희 목사와 연관하여 순천노회 사건을 조명한다. 박용희는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었고 항일투쟁으로 명성이 있었다. 이런 인사가 순천노회의 순천중앙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기에 노회원 전원을 체포하여 순천경찰서에 수감하고 이후 광주로 이감하여 3년에서 1년의 언도를 내리기까지 3년의 세월에 걸쳐 교회를 탄압했고 이러한 예는 다른 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순천노회가 강압에 의해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하더라도 여수군 율촌면 애양원교회에 시무하던 손양원 목사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노회를 탈회했다. 양용근도 순천노회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옥사한 유일한 목사로 기록된 것을 보면 단순히 박용희 목사로 인해 순천노회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설사 박용희가 일제의 경계대상이라 했을지라도 이미 손양원이나 양용근 같은 신사참배 반대자들이 있는 것을 경계하여 15인 구속사건이 발생했다고 본다. 박용희가 반일주의자임은 그가 목사임을 미루어 그 역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인사였음을 반증한다.

 

 그럼에도 순천노회는 조직적으로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전개한 일은 없다. 다른 문제나 사건으로 일제에 항거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단순히 기독교의 목사 혹은 장로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구속했다. 대부분 종말론 사상을 강조하여 다가올 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였다는 것이 그들의 죄목이다.

 

 김승태는 “이 사건의 개요는 알려져 있는 대로 1940년 11월 순천노회 소속 목사와 전도사들을 순천경찰서에서 치안유지법위반혐의로 구속, 기소하여 재판을 받게 하고, 3년에서 1년에 이르는 실형을 선고하여 옥고를 치르게 함으로써 노회원들을 탄압한 사건이다.”라고 지적했다. 이 사건은 신사참배에 관한 역사 연구에 있어 사가들에게 밀렸거나 주목을 받지 못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러다가 김승태가 이 사건의 판결문을 입수하고 번역하여 알려제게 된 것이다. 이 판결문에 의하면 순천노회 사건에 관련된 사람은 박용희 목사 등 15명이다. 이들 중 3명은 전도사였는데 교회의 장로를 겸하고 있던 노회원들이었다. 이들 15명이 당시 노회원 전원이었기 때문에 전 노회원이 구금되는 최초의 사건이라고 앞에서 설명했다. 이 3명 전도사를 제외한 12명은 모두가 평양신학교 출신이고 2명은 중퇴자였다.

 

 순천노회 박해사건에서 구속된 15인 가운데 14인이 형기를 마치고 출옥했으나, 유일하게 양용근은 옥사했다. 그것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를 당한 것이다. 이는 다른 인사들은 신사참배 문제에 있어서 옥고를 치르면서 신앙양심과 다른 처신을 했거나 중도포기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런 상황에서 양용근만이 유일하게 출옥하지 못하고 순교한 것은 순천노회 박해사건과 신사참배 문제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3) 순천노회 사건 어떻게 볼 것인가?

김승태는 이 순천노회 사건을 경상도와 서북지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처럼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과는 다른 양상이지만 그들 못지않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일제의 교회 박해에 대항한 또 다른 유형으로 보았다. 순천노회 사건은 일제가 1940년 9월 20일 새벽을 기하여 전국에 발한 ‘조선기독교도 불온분자 일제검거령’에 의해서 체포되었고 잠시 풀려났다가 11월 15일경에 다시 전원 구속된 사건이기 때문에 명백한 일제에 의한 기독교 박해사건이라고 했다. 그들은 전원 구속되어 전원 징역형을 선고 받고 복역을 한 것으로 보아서 한 사람의 변절자도 없이 옥고를 치룬 평가할만한 사건으로 보았다.

 

 김승태는 순천노회 사건 판결문을 분석하여 그들의 신앙과 사상을 검토하였다고, 피의자들이 가진 신관, 현세관, 미래관, 정치. 사회관과 민족의식 등을 검토했다. 그들의 신관은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 절대 최고 지상의 신임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한 목사로서 1907년 독로회가 채택된 ‘대한예수교장로회신경’ 제2조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은 홀로 하나이시니 오직 이만 경배할 것이라. 하나님은 신이시니 자연히 계시고 무소부재하며 다른 신과 모든 형용물과 부동(不同)하시며 그 계신 것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과 사랑하시는 일에 대하여 무한하시며 무궁하시며 변치 아니하시나니라.” 라고 한 것을 그들의 신관으로 받아드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신관을 가진 이들은 기독교의 신관을 따랐기 때문에 정죄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현세관은 일제강점기 특별히 1930년대 이후 해방까지의 한국 상황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참한 암흑기로 보았다. 일반 민중들은 전쟁물자 수탈로 인해서 풀뿌리로 연명을 하였고 강제 징용, 정신대 차출 등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후에는 일제가 전쟁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이 그 시대를 말세로 보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들은 종말론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이루어질 천년왕국을 이야기하면서 일본의 패망을 주장했다고 했다.

 

 그들의 판결문은 그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유죄판시했다. 치안유지법을 적용한 것은 그들이 ‘국체변혁’을 목적으로 교인들을 선동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순천노회 사건을 일제의 종교탄압의 실체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기독교 박해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들이 강요하는 신사참배에 대해서 겉으로는 마지못해 적응’을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설교를 통하여 공언(公言) 하여 그 행위가 가진 정치적. 종교적 의미를 무효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일제와 타협하여 ‘순응’하였던 기성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이를 끝까지 거부하고 기성교회 밖에서 투쟁하였던 경남, 평양 지역 신사참배 거부운동 그룹과는 그 대응 양상을 달리한다.”라고 했다.

 

 반면, 최덕성은 그의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사건의 재평가’에서 순천노회 사건이 신사참배반대운동으로 당한 수난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이를 신사참배 반대를 위한 항쟁으로 보는 것은 경남, 서북, 만주지역의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을 폄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위의 글을 통해 순천노회 교역자 사건에 대한 기존연구가 제기하는 의문을 세 가지로 집약하고 있다. 첫째, 이 사건은 과연 신사참배 거부 항쟁으로 인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순천노회는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에 앞서서 그것을 거행하기로 결정했고, 소속 교역자들이 그것을 반대했거나 문제시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런데도 기존 연구는 수난자들이 마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투옥된 것으로 기술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 사건을 손양원 목사와 관련시킨다. 여수 애양원의 목회자 손양원이 마치 순천노회에 소속된 교역자였던 것으로 단정하고 손양원의 일제 항거를 순천노회의 신앙투쟁사 혹은 항일투쟁사의 일부로 엮는다. 이명동일신설(異名同一神說)이라는 것을 주장한 박용희 목사를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선동한 주범”으로 내세운다. 이 모든 것은 사실과 다르다.

 

 둘째, 신사참배 사건으로 인하여 한국기독교계 전체가 소용돌이 치고 있을 때 순천노회 소속 교역자들은 무려 3년간이나 옥살이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위협하는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것을 거부하지도 않았고, 우상숭배를 하지 않도록 가르친 바도 없다.

 

 셋째, 순천노회가 일찌감치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교역자들이 모진 수난을 당하면서도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은 것은 혹시 박용희의 이명동일신론이라는 불경신관(不敬神觀)의 영향 때문

은 아닌가? 일명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이라고 불리는 박용희의 신학은 천조대신과 여호와 하나님은 이름이 다르지만 실상은 같은 신이라는 이론이다. 기존의 연구는 박용희의 이명동일신론이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을 무의미화 시킨 것으로 본다. 그러나 오히려 십계명의 제1계명과 제2계명을 무의미화 하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무의미화한 것으로 보인다. 교역자들이 신사참배에 대해 저항을 하지 않은 것과 박용희의 신학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런 근거를 통해 순천노회 사건은 신사참배와 무관한 사건이며 그들이 어려운 고초를 당하면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하지도 않았고 반대를 가르치지도 않은 것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이 순천노회 사건은 손양원의 애양원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교회가 신사참배문제로 인해서 순천노회를 탈퇴한 상태였기 때문에 손양원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순천노회와 결부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의 판결문에도 신사참배 반대에 관한 죄목이 없기 때문에 순천노회사건은 신사참배와 관계가 없는 사건이라고 했다.

 

 김승태는 “최덕성 교수의 ‘순천노회교역자 수난사건 재평가’에 대한 반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해서 반론을 제시했다. 이 반론에서 김승태는 최덕성이 주장하는 부정적인 견해에 대해서 몇 가지로 반론을 제시한다.

 

 하나는 순천노회 사건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아니라는 최덕성의 주장에 대한 답변이다. 최덕성은 순천노회 사건을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분류하는 김승태와 통합측 순천노회의 주장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순천노회사’에서 양용근 목사 나덕환 목사 김정복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리다가 투옥되었다고 기술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김승태는 이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했다고 주장한 바는 없고 또 다른 유형의 저항운동이었음을 주장했다고 하여 순천노회 사건이 또 다른 저항의 유형이지 신사참배 반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 최덕성은 순천노회 사건의 주동자로 볼 수 있는 박용희 목사(그들 중 최고의 징역형인 3년을 언도 받았다)의 이명동일신론을 내세워서 그들이 신사참배 반대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사참배를 합리화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순천노회 사건의 피의자들이 신사참배에 대해서 반대를 하지 않은 이유를 “이명동일신론이라는 불경신관(不敬神觀)의 영향 때문은 아닌가? 일명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이라고 불리는 박용희의 신학은 천조대신과 여호와 하나님은 이름이 다르지만 실상은 같은 신이라는 이론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김승태는 최 교수가 “이명동일신론”을 “동조동근론”과 같은 것으로 보고 “천조대신과 여호와 하나님은 이름이 다르지만 실상은 같은 신이라는 이론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이명동일신론”과 “동조동근론”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용어라고 반박한다. “동조동근론”이란 일제가 그들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역사를 왜곡하여 만든 이른바 “일선동조론” 내지 “내선일체론”(内鮮 -體論)과 관련된 용어이고 “이명동일신론”도 박용희 목사의 설교문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지금까지는 오직 이 판결문과 당시 일본인인 가루베 경부(?? 한문??)가 한 말 가운데 나오는 말이고 박용희가 이런 말을 했거나 가르쳤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김승태는 최덕성 교수의 주장과 글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최 교수의 글은 새로운 주장은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새로운 자료가 미흡하고 지나치게 교단적 분파적 편견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으며 신사참배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다른 일제에 대한 저항은 평가절하하고 있다고 했다. 최덕성과 김승태의 순천노회 사건이 신사참배와 관련된 사건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필자도 나름대로 의견이 있다.

 

 최덕성이 순천노회 수난사건이 신사참배 반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르면서도 한 사람도 신사참배를 반대하거나 신사참배를 하지 말도록 가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김승태도 순천노회 사건이 신사참배와는 무관하고 일제의 기독교 압박에 저항한 또 다른 유형의 저항운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사건에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일일이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직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교회가 일제에 반항하는 대표적인 저항이 신사참배 반대였고 일제는 그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검거했으며 특별히 목사들에게는 이것이 제일 큰 죄였다. 김승태와 최덕성 두 사람이 다 당시의 판결문을 가지고 개인 판결문에 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죄목이 없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지 않거나 신사참배 동조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판결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에게 형을 선고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유일 절대 최고 지상의 전지전능하신 신으로서 우주에 있는 만물을 지배하고 또 영원히 불멸하는 자로서 모든 신은 여호와의 지배하에 있다... 천황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그 신의(神意)에 의하여 그 통치권을 박탈하는 것이라면 우리나라(일본)의 흥망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의(神意)에 달려있다고 망단(妄斷)하고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신은 모두가 우상인바 우상숭배는 십계명의 하나로서 성경의 교리요, 또한 그것 때문에 신사에 참배하지 말 것이라 하는 불경신관을 견지하여 오래 동안에 걸쳐 신사참배를 기꺼워하지 않았지만 당국의 강요에 의하여 마침내 어쩔 수 없었다.

 

 소화(昭和) 13년(1938) 4월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면 소재 구례교회에서 개최된 제22회 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르렀지만 이는 본래부터 일시(一時)를 호도(糊塗)하고 어둡게 하려는 궁여지책에 불과한 것으로 피고인들 가운데는 혹은 의연히 신사는 우상이라고 하는 불경신관을 견지하고 있는 자도 있는 동시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판결문에서도 노회에서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를 가결했지만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기에 이들에게 실형을 선고한다는 취지이다.

 

 그들 15명을 다 조사할 수 없지만 그 중 한 사람인 양용근 목사의 평전에 의하면 그는 시종여일하게 신사참배 반대를 했으며 옥중에서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가 옥중에서 전도한 사람들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서 간수들에게 초죽음을 당하도록 매를 맞았다. 그는 검찰의 취조과정에서도 많은 회유를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지극히 간단하다. 지금 한마디 말로 족하다. 즉 ‘신사참배에 동참하겠다’ 는 말 한마디가 네가 지은 모든 죄에서 너를 해방시켜 줄 것임을 약속한다. 그 말이 너무 길다면 ‘예’,혹은 '아니오’ 라고만 대답해도 된다. 그 ‘예’나 ‘아니오’ 란 단 한 마디가 너를 죄에서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은 죗값을 치르는 고난의 길로 가게 해줄 것이다. 신중히 생각하라. ‘예’ 뒤에는 자유와 행복이 뒤따를 것이나 ‘아니오’ 뒤에는 징역살이와 불행이 뒤따를 것이다.”라고 회유했으나 당당하게 거절했다.

 

 진병도는 양용근 목사의 아내 유현덕이 생전에 있을 때 직접 만나서 구술로 양용근 목사의 생애를 생생하게 들었으며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숨겨진 순교자의 행적을 찾아서 평전을 기록했다. 이 기록들의 역사적인 고증을 위해서 더 많은 자료들을 찾아서 밝혀야 할 것이지만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서서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던 양용근의 모습들이 같은 시대 같은 학교를 다니며 같은 노회 소속으로 일했던 다른 피의자들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순천노회 사건에 연루된 목회자들이 조직적인 반대운동이 없었다고 다 신사참배에 반대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살펴보고 그들이 연루 된 순천노회 사건을 바르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4. 양용근 목사와 신사참배 반대

 

1) 양용근의 신사참배 반대

순천노회의 양용근과 김형모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순천 매산학교에서 수학했다. 캐나다선교부는 신사참배 문제와 학교 교육은 별개의 문제라 하여 일제에 대한 투쟁을 기피했다. 반면 미국남장로교 선교부의 태도는 강경했다. 이들은 신사참배 문제와 학교 교육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고 종교적 신앙적 차원에서 대응했다. 이는 풀턴(Darby Foulton)의 영향 때문이었다. 풀턴은 신사참배 강요 상황에서 학교사업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비장한 내용을 발표했다. 양용근을 포함한 순천노회 박해사건의 15인의 혐의 내용은 이들이 교회나 이웃에게 설교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 심판, 말세의 징조, 천년왕국을 외침으로 일본이 망하고 하나님나라가 세워진다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내려진 판결은 박용희에게 징역 3년, 양용근 등 7인에게는 징역 1년 6개월, 김형모 등 7명에게는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이들은 다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였으나 양용근은 옥사했다. 15인 가운데 양용근만이 옥사를 한 이유는 양 목사가 고흥지방 도사경회에서 일본의 신사참배 요구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한 전력과 옥중에서도 이 신앙사상을 꺾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용근의 순교는 주기철과 맥을 같이 한다. 주기철은 신사참배 문제에 있어 자신의 역할은 3선을 지킨 것이라 했다. 1선은 한국교회이고, 2선은 신학교이다. 3선은 한 성도 한 성도 개인인데 주기철은 3선 곧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옥고를 치루면서도 신사참배에 굴종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양용근도 동일했다. 이미 자신이 속한 노회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서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비록 이때는 전면에 나서 반대를 관철하지 못했지만 양용근은 15인의 노회원 중 유일하게 이 문제로 옥사했다. 도사경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를 설교할 만큼 자신의 3선을 강하게 지켰던 것이다. 신사참배를 요구받는 상황에서 이를 반대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강조한 것이다. 손양원은 신사참배 문제로 순교한 것은 아니지만 신사참배 거부자였다.

 

 이런 손양원 목사가 순천노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제의 경계대상이었다. 손양원과 양용근이 교제하고 있었다는 것은 세 살이나 위인 손양원이 가진 신사참배 반대 사상을 양용근과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양용근이 신학생시절에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기록을 보면 같이 신학교에 다닌 손양원과 깊은 동맹이 있었고 기도모임까지 같이 했음을 보면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순천노회의 지도자격인 박용희 목사가 저명한 독립운동가요 반일투쟁가였던 것도 양용근과 무관할 수 없다. 노회를 이끈 지도자로서의 한계로 박용희 목사가 드러내놓고 신사참배 반대를 이끌 수는 없었지만, 그의 독립운동과 반일투쟁에는 목사로서 가지는 신사참배 반대가 당연히 내재되어 있었고 15인의 판결문에도 어느 정도는 밝혀져 있다. 또한 박용희가 3년형으로 가장 긴 형을 선고받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박용희는 1919년 삼일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여 이승훈과 이상재의 소개를 받아 33인의 독립선언 후에 후속 책임을 이상재가 맡고 박용희 조사는 여러 인사와 활동을 계속하라는 계획의 지시에 따라 오상준 함태영 등과 함께 재정부의 책임을 맡았다

 

 노회 지도자의 이런 사상은 자연스럽게 양용근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일제는 다른 도에 비하여 순천노회가 신사참배로 인한 투옥 자가 없었기 때문에 전남경찰서가 이 기회를 이용해 실적을 올리기 위해 전원 검거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박용희는 물론 결국 옥중 순교한 양용근과 같은 인사를 검거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이 문제로 순교는 아니라도 나덕환 목사와 김정복 목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순천노회사는 ‘일제의 핍박아래 신사참배 반대로 많은 고난과 순교까지 당했던 순천노회’라고 기록한다. 이는 순천노회 박해사건이 신사참배 문제와 유관한 사건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양용근은 순천노회에서 신사참배 문제에 관한한 반대를 적극적으로 표명하다가 순교한 인사임을 알 수 있다.

 

 양용근이 관동 대지진 사건 당시 형과 함께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일본 유학 시 일본의 정치와 종교에 대하여 관통했던 것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이유가 된다. 다른 노회원들도 양용근처럼 드러내 놓고 반대를 한 흔적은 없거나 약하지만 이들이 검거되어 투옥된 것을 감안하면 신사참배 반대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15인 가운데 양용근 목사만이 이 문제로 감옥에서 순교하고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기고 있다는 것은 재평가 내지 고평가가 되어야 할 일이다.

 

 

2) 목회와 설교를 통해 본 신사참배 반대

양용근은 학창시절부터 신사참배를 반대했다. 이런 그가 조사로 만 2년, 목사로 만 2년 간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리 긴 기간이 아니었으나 주일을 위시한 모든 예배 모임에서 설교자로 활동했다. 양용근이 고흥지방의 도사경회에서 신사참배를 반대로 설교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15인이 검속되어 심문을 받을 때 일경은 이들의 설교를 문제 삼아 이를 빌미로 심문했다. 심문내용가운데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죄목이 포함되었다.

 

 이는 당시의 한국의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양용근이 성경을 절대 신봉하는 목사였음을 반증한다. 목회의 꽃은 설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개개인의 구원을 이루고 그의 성장을 조형한다. 양용근의 설교는 그의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이것은 15인의 구속자 중 순교했다는 것이 입증한다. 정상적인 목사라면 누구라도 자신이 전한 설교에 제한을 받는다. 양용근은 신사참배를 반대해야 한다고 설교했고 이를 웅변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나타냈다.

 

 광주지방법원의 판결문도 이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이 성경절대 신봉에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15인의 인사 중 양용근만이 순교한 것은 그의 짧은 기간의 목회와 설교가 당시 시대상에 맞물려 신사참배 반대로 일관했고 이를 반대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3) 광주지방법원 판결문에 나타난 신사참배 반대 정신

순천노회 사건에 연루 된 15명의 판결문에 의하면 그들의 죄목이 거의 비슷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 모두 다 그들의 교회나 이웃교회 혹은 이웃 사람들에게 말세론을 전하고 천년왕국의 도래를 전해서 국체변혁을 꾀한 죄라고 했다. 이들 모두가 전천년설에 근거한 천년왕국을 이야기 한 것을 죄목으로 했다. 그러나 양용근 평전은 양용근이 평양신학교에서 이눌서 교수에게 조직신학을 배우면서 무천년설을 배웠기 때문에 검찰은 천년왕국을 설파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양복근(용근) 목사는 재판장의 판결 이유를 들으면서 착잡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하시모또(橋本) 검사에게 심문을 받았을 때 진술한 내용과 '판결 이유’ 를 비교해 볼 때 상당 부분이 다르게 된 사연을 알 수 없다는 것이 그를 당혹하게 한 소재였다. 그는 분명히 무천년설을 성도들에게 설교했다고 진술을 했는데, 일본의 이다 검사는 기소문을 낭독할 때부터 양 목사도 천년전기설로 설교했다고 했다. 그것은 아마 순천노회 교역자 열네 명의 피고들을 신문할 때 한결같게 전천년기설을 진술했기 때문일 것이다. 검사가 듣고 그것을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정설로 학습을 해서 그의 기독교 지식으로 고정시켜 버린 탓으로 양 목사는 짐작을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누락시킨 내용의 주된 것을 무천년설, 이신칭의, 신사참배 반대, 우상숭배 등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판결문은 그들의 신상과 그들의 형량 등을 파악하는 데는 정확한 기록이겠지만 구속 이유나 죄명 등은 다소 그들의 편의대로 기록을 한 것으로 본다. 일제가 작성한 판결문의 개별 죄목에 신사참배 반대가 기록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신사참배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다고 볼 수 없다.

 

 

4) 양용근의 후손들

양용근은 옥중에서 순교했고, 그의 후손들은 재건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양용근의 맏형인 양용이가 설립한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의 오사교회는 지금도 대한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 소속이다. 양용이의 장남 양영식이 세운 광양군 옥곡면의 대죽교회도 처음에는 재건교회로 시작되었다. 양용근의 둘째형의 삼녀인 양영례가 순천에 세운 재건순천교회도 지금까지 재건교회로 남아 있다. 양용근의 네 형제의 후손들도 재건 혹은 고신에서 신앙생활 혹은 목회하고 있다.

 

 순천노회의 양용근이 순교한 후 과부가 된 부인과 어린 네 자녀들은 힘겨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더욱이 가족들은 일경에 의해 구례읍교회에서 쫓겨났다. 양용근의 장남 양영욱은 자신과 동생들이 한경직 목사에게 큰 혜택을 입었다고 증언한다. 한경직은 양영욱에게 “순교자의 자녀답게 참고 견디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다. 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한경직 목사가 양용근 목사야 말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옥중 순교한 목사라는 점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나가면서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 사건은 노회원 전원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실형을 산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들이 조직적으로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고 또 개인적으로도 신사참배 반대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신사참배와 연관이 없는 사건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여러 제한이 따른다. 이미 살펴본 대로 순천노회 박해사건을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차별을 두고 폄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드러난 신사참배 반대만이 최고의 항쟁이고 은익 된 항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도 바른 시각이 아니다.

 

 특별히 신사참배 반대의 증거가 없다고 해서 모두 신사참배를 했다고 재단하는 것도 잘못이다. 어려운 시기에 1년에서 3년까지 옥고를 치렀고 그 가운데 순교자까지 배출한 사건을 그저 우연히 단속에 걸려 고생을 한 단순한 사건으로 보는 것은 당사자들이나 그들의 후손은 물론 주님의 교회 역사에 예의가 아닐 것이다.

 

 양용근은 손양원과 신학교에서 함께 수학했고, 김형모, 안덕윤과 함께 일사각오로 뜻을 같이한 기도의 동지였다. 손양원은 해방 후 목회자로 활동했고, 6.25 전쟁 중 순교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양용근은 짧은 목회 활동 중 순교를 하였고 전기한 이유대로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잊혀진 순교자이다. 순천노회 사건에 연루 된 교역자 중에도 순교한 양용근 외에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했던 인사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일제에 대항하여 억울하게 옥고를 치른 사람들을 신사참배 반대와 무관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재 검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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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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