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과 빛(마태복음 5:13-16)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천국백성을 말합니다. 이는 오늘날 주의 제자 된 모든 성도와 모든 교회들에 세상에서의 위치와 해야 할 역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근본적인 사명은 어떤 삶의 모습으로든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11:36, 고전10:33). 그런데 이 같은 사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해 가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소금으로’ ‘빛으로의 교훈입니다.

 

. 세상의 소금

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소금은 고대의 종교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30:35, 2:13), 하나님과의 영원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었습니다(18:19).

 

소금은 그 가치가 대단했습니다. 로마제국은 군인에게 월급 대신으로 소금을 주었습니다. 월급(Salary)이라는 단어는 소금(Salt)에서 유래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셨습니다.

 

본문의 언급처럼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은(14:34,35) 매우 흔한 것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금의 용도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금은 음식을 보존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음식에 살짝만 뿌려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집니다. 젓갈과 같이 염장한 음식은 상당히 오래 되어도 잘 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물고기를 잡으면 대부분 소금에 절여 보관하여 두고두고 먹었습니다.

 

안동 간고등어도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안동은 바다와 밀접해있지 않은 내륙지방이었고 이로 인해 원래부터 싱싱한 해산물을 접하기에는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동 사람들은 가까운 지역인 영덕에서 해산물을 가져와 얻을 수 있었는데 상하지 않도록 소금을 잔뜩 묻힌 고등어가 영주에서 안동까지 오는 시간동안에 밀려오는 햇빛과 바람에 의해 자연적으로 숙성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로를 건너오는 동안 흔들리며 물기는 빠져서 간이 되어있는 간고등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소금은 조미료 역할도 합니다. 요즈음에는 각종 조미료가 많지만 그래도 맛은 소금으로 내야 제격입니다. 본문에서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엄격히 말하자면 소금은 맛을 잃을 수가 없습니다. 염화나트륨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대세계에서 사용된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에서 추출된 것이라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습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되어 나오기 쉬웠습니다. 그렇게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찌꺼기는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에는 맛을 잃은 소금 엄격히 말하면 불순물은 평편한 지붕의 흙더미위에 뿌려진다고 합니다. 이 소금 때문에 지붕의 흙이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평평한 이스라엘의 지붕은 운동장도 되고 공공집회 장소도 되기 때문에 그곳에 뿌려진 소금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함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세상의 썩어 가는 부분을 방지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그 가치를 발휘하려면 일단 녹아야 합니다. 소금이 녹지 않고 덩어리째 그냥 있으면 아무 쓸모없습니다. 어떤 경우든 소금이 사용되어 자신의 모습을 희생시킬 때 소금의 맛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도를 소금이라 함은 성도가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자기희생의 극치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성도를 소금이라 함은 신자의 역할을 강조한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는 믿는 이로서의 행위가 있습니다. 성도는 욕과 행패 그리고 나쁜 짓을 삼가 해야 합니다. 덕을 세우지 못하고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일도 금해야 합니다.


불신자가 그런 행동을 하면 사람들은 교회를 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다니는 이가 그런 행동을 하면 교회가 욕을 먹고 비방을 받습니다. 성도는 성도로서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바로 천국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소금된 성도의 사명입니다.

 

. 세상의 빛

5: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11:7에는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라고 했습니다.

 

13절에서처럼 너희가강조됩니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2: 19). 그러나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 한바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42:6,49:6).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입니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어두움을 밝힙니다. 빛이 없다면 깜깜해서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어둡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주택에 살고 밝은 조명 아래 살아도 죄 가운데 살아간다면 그는 어두움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은 성도를 빛으로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밝게 비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빛이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옛날 중동지역에는 방어상의 이유로 산 위에 동네를 건설했습니다. 적들이 쳐들어 와도 쉽게 방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예루살렘 성입니다. 이 성은 높은 산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좀처럼 점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 산 위에 있는 동네도 빛이 비치면 자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고대마을은 보통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태양 아래에서는 유난히 빛이 났습니다. 밤에도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로 인해 흰 건물이 드러났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입니다.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기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입니다.

 

퍼져나갑니다. 빛은 가까이 있는 곳을 밝게 비추고 멀리 떨어질수록 점점 약합니다. 세상의 빛 된 그리스도인들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내 가족 친지들에게 먼저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지역에 교회가 들어서면 그 교회 주위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교회가 주위 사람들에게는 비난받고 멀리 떨어진 곳의 사람들에게는 칭찬 받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아프리카 등 세계 여러 지역에 사람을 보내고 선교비를 보내는 등 열심을 내면서 가까이 있는 지역사회를 위해서는 무관심한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먼저 자기가 속한 지역을 위해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서로 멀리 있는 데를 비추려다 보니 힘이 많이 들고 효과는 적고 교회는 많아도 늘 주위에서 비방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참빛 된 성도의 생활입니다.

 

적극적으로 비춥니다. 5: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빛을 숨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여기 은 곡식의 양을 재는 보통 8.25리터의 양을 담는 나무그릇입니다.


등경은 촛불받침대를 말합니다. 등경은 빛이 멀리 비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지 않고 말 아래 둔다는 것은 등불을 가두어둔다는 뜻입니다. ‘등경 위에 둔다는 것은 빛을 비추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등불을 켜는 목적입니다.

 

세상의 빛 된 성도는 이 빛을 감추어 두지 말고 적극적으로 비추어야 합니다. 마치 산꼭대기에 선 자처럼(2:2)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행실과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를 널리 전해야 합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빛은 생명의 힘입니다. 공기와 토질 등의 조건이 다 맞아도 적절한 빛의 공급이 없으면 그 식물은 자랄 수 없습니다. 또한 빛은 살균작용을 합니다. 이런 빛을 통해 결국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도는 생활 중에 믿음, 기도, 사랑, 봉사 등의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 착한 행실

5:16 이하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본문에서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결론의 말씀입니다. 핵심단어는 착한 행실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착한 행실입니다. 제자 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의를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빛을 보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가 소금으로 맛을 내고 어둠을 밝히는 빛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습니까? 바로 착한 행실을 통해서입니다. 성도의 신앙은 착한 행실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도 중에 보면 개인 경건에 힘쓰는 이가 많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에도 힘쓰고 예배에 잘 나오는 경건입니다.


이는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고 만다면 개인의 신앙에는 유익할지 몰라도 주위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너희 착한 행실을 보게 하라고 했습니다. 착한 일을 할 때에 사람의 눈에 띄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습니다(7:1).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고 칭찬 받으려 하는 것은 외식이라고 말씀하시며 경계했습니다.

 

16절의 본 뜻은 칭찬 받으려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하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착한 행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선이 삶에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진실한 삶, 정직한 삶, 어려운 이를 도와주는 따뜻한 사랑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류소에 현수막이나 걸고 벽에 포스터나 붙이고 엘리베이터 안에 광고물을 붙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 저 사람 행하는 모습을 보니 믿고 싶다, 교회에 다니고 싶다라고 하는 고백이 나오도록 성도에게서 착한 행실이 나타나야 합니다. 결국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도 기쁘게 됩니다. 그런 사람 이 결국 하나님께 복도 받게 됩니다.

 

빛과 소금의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이세상이 부패와 어두움으로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거하는 세상의 실상을 분명히 깨닫고 세상과 혼합되지 않도록 엄격하게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실 수많은 십자가 불빛이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지만 우리의 사역활동은 점점 미미해져 갑니다.

 

죄악 된 세상과 타협하므로 그리스도인의 본연의 사명을 도외시하면 안 됩니다. 현실의 부조리와 죄악에 대해 비판적 조소만 던지고 악한 세상에 대해 방관만 하는 자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더 큰 어둠으로 덮이게 될 것입니다.

 

참 성도라면 세상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건설적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고 그에 앞서서 그 대안을 실천하는데 솔선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