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간 목회에도 개인과 주변교회 그리고 노회 혹은 총회나 특별기관에서 후원하나만 살피고 의존하려는 마음을 목사들이 벗었으면 한다.
상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식당에 다녀오다가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도무지 꽃이 필수 없는 주차장 모퉁이에서 노란 꽃을 피운 장면을 본 것이다. 지나치면서 참으로 생명력이 강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해 곧 시들 것이라고 여겼다.
말도 못 하는 식물이지만 불쌍하다는 생각도 처절하게 들었다. 이를 같은 시간에 목격한 김종선 목사는 “목사님, 이것 좀 보세요. 개척교회 때의 처절한 때가 생각납니다.”라고 전했다. 같은 장면을 대하면서 생각이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김 목사는 그 장면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교회 집사들에게 보내면서 내게 전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랬더니 한 집사가 “옆의 꽃은 초원교회인가요?”라고 댓글을 달았다. 아주 작은 초라한 꽃은 선한교회이고 그나마 좀 크고 잘 자란 꽃은 초원교회란 생각이 든 것이다.
김 목사가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안다. 또 초원교회와 나에 대해 선한 말로 간증했기에 그 교회 등록한 지 얼마 안 되는 성도도 바로 초원교회를 빗대어서 표현할 정도가 된 것이다. 이런 김 목사임을 알기에 나 역시 관심을 사랑으로 연결하려 노력하고 있다.
김 목사는 신학교 59회이다. 식사 중 대화하면서 동기들의 교회에 대해 전한다. 대부분이 50대 중반을 통과하는 동기들이다. 하지만 아직도 미래 자립교회로 분류되는 교회들이 많다. 김 목사도 지하에서 8년간이나 훈련을 받았지만, 지금은 주님께 받은 사랑을 감사하면서 교회를 담임하고 성도를 잘 이끌고 있다.
금요일마다 교회로 기독교보가 도착한다. 교단 목사로서 관심을 가지고 우선 대충 살핀다. 그리고 기억했다가 필요한 부분부터 선후를 정하여 읽는다. 광고성으로 나온 것들은 바로 읽고 지나친다. 그런데 나의 시야를 잡은 것이 있다.
총회 전도위원회에서 어느 노회를 방문하여 선정된 미래 자립교회를 후원했다는 기사였다. 그런 혜택을 받은 교회와 목사 중에는 내가 잘 아는 후배들이 있었다. 더욱이 내가 1995년에 일시에 300만 원을 후원한 목사도 있었다. 교회 이름도 그대로였다.
28년이란 세월이 이미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본 것이다. 마음이 아팠다. 이런 기간이라면 자립하고 다른 교회를 후원하는 정도가 되어 있었으면 했다. 백번 양보해서 선교나 구제는 못하더라도 지원을 받는 것은 면해있어야 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들이 곧 목사안수를 받는다. 앞으로 개척을 할 것인지 아니면 기존 교회에 부임하여 사역할지는 주님만이 아신다. 개척의 경우 스스로 장기간에도 자립하지 못하면 금식기도라도 하면서 헤쳐나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싶다. 아니면 특별결단을 해야 한다.
다른 교회나 목사를 후원해야 할 재원이 30년 가까이 목회한 목사에게 돌아오게 한다면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실 나는 개척한 후 단 한 교회로부터도 후원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개인의 헌금이나 가족의 후원은 있었다.
그러면서도 첫 달부터 러시아 선교회를 위시하여 현재까지 계속하여 선교하는 교회로 자리매김했다. 이를 자랑하지는 않지만, 앞의 사례를 대하면서 긍지가 된다는 생각이다. 목회 후반기다. 장로들에게 신학대학원을 후원하고 교수들을 초청하여 설교를 듣고 감사도 하자고 전했다.
장로들은 모두 이에 긍정하고 목사인 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 주고 있다. 고려신학대학원에 특별후원은 이번의 4월 18일 경건회 설교를 하면서 전할 것까지 합하면 두 번째다. 물론 종종 신학대학원 후원 주일을 지켰다. 1998년에 고려신학교를 위해 일시에 870만 원의 후원헌금을 드리고 매월 재정 수입의 3%를 후원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편이다.
지난 특별후원에 장로들과 한 권사 그리고 내가 헌금을 드려 교회의 부담은 전혀 없었다. 이번에도 한 권사를 포함한 장로들이 전액을 개인적으로 모아 감당함으로 교회의 부담은 역시 없었다. 장기간 목회 함에도 개인과 주변교회 그리고 노회 혹은 총회나 특별기관에서 후원금을 전하는가만 살피고 그것을 받으려고 애쓰며 의존하려는 마음을 목사들이 벗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