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원을 위해 멋지게 사용을 받은 사랑의 전도사(김형남)와 전도인 권사(김옥순)를 기억하며 누구에게인가 나도 그런 목사로 남기를 바라고 있다.
고향에서 교회에 다녔던 노인이 사랑방에서 어린이들을 모아 말씀을 가르쳤다. 이때 친구들을 모아 말씀을 열심히 들었다. 아브라함과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는 그때 들었다. 그러나 구원의 감격을 가진 것은 중학생 때였다.
나의 신앙 초기에 영향을 준 두 사람이 기억난다. 김형남 전도사와 김옥순 권사이다. 어려서 들은 말씀이 있고 노인을 따라 교회 절기에 교회에 갔던 기억은 교회에 나가는 것에 대한 담을 낮추었다. 중학교 때 스스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친구에 의해 경향교회로 인도를 받았다. 이때 만난 사람이 김형남 전도사였다. 당시 고령이었던 전도사는 불편한 몸에 심방 가방을 어깨에 메고 성도의 집마다 심방을 다녔다. 우리는 개봉동에 살았는데 교회가 서울역 앞 동자동에 있을 때나 여의도로 이전했을 때도 전도사의 사역은 늘 같았다.
개봉동에 살 때 어머니는 거의 장사를 하러 다녔기에 삶이 고단했다. 나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출석은 시작했지만, 주일성수를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물론 신앙도 그에 미치지 못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종종 아파트 입구의 연탄을 때는 공간에 달걀 한 줄을 놓고 가는 이가 있었다. 쪽지나 엽서에 글을 남기고서다.
김형남 전도사였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시간에 맞추어 밤늦게 심방을 오기도 했다. 당시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있었다. 그때는 학교에서 매월 혹은 분기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우등상장을 주었다. 이런 상을 많이 받아 특별한 상은 어머니가 액자에 담아 걸어두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대전에서 서울로 전학을 왔고 첫 달부터 우등상장을 받았으니 공부에는 재주가 있었다. 김 전도사는 우리 가정의 형편과 나의 성적을 확인하고 대단히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자주 담임목사에게 장학금을 지원하자고 건의했다. 이를 당시에도 들은 바가 있는데 그 후에 전도인 사명을 감당한 김옥순 권사에게도 들었다.
김형남 전도사에 이어 김옥순 권사가 우리 가정에 자주 심방을 하였고 김 권사도 담임목사에게 나에게 장학금을 후원하자고 건의했었다. 그러나 단 한 차례도 혜택을 받지는 못했다. 한번 후원하면 계속해야 한다는 압박감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김형남 전도사는 박봉의 사례로 살면서도 나에게 종종 위로의 후원금을 건넸다. 그분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시 워낙 고령이었기에 내가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주님의 품에 안긴 후였다. 내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 전도사를 모시고 살았던 한 처녀 누이가 있었다. 가난한 시절에 전도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직장을 다녔고 전도사에게도 도움을 주면서 함께 교회에 출석했던 누이였다. 그의 이름도 알지 못하였고 그저 얼굴만 잘 알았다. 한동안 교회에서 보았으나 전도사가 귀천한 후 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해에 강희석 장로의 장례식을 집례할 때 뜻밖의 손님을 만났다. 바로 김형남 전도사를 모시고 살았던 이였다. 그는 목사의 아내가 된 손영자 사모였다. 손 사모는 우리 교회 손정애 권사의 동생이었다. 이때 세상은 참으로 좁다고 생각을 하면서 장례에 임했다.
이제는 고령이니 은퇴한 목사의 아내로 살고 있으나 여전히 어린이 등을 돌보는 사역을 감당하다가 지금은 다른 일을 감당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분주하게 생활하고 있었기에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장례 중에도 길게 대화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코로나19 상황이어서 만남까지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내가 청하여 김형남 전도사의 사진이라도 있으면 보내달라고 했다. 감사하게도 사진이 도착했다. 그에게 딸이 한 명 있는데 미국에 산다며 그 가족사진도 한 장을 보내주었다. 사진으로 대했을지라도 대단히 반가웠다. 1970년대에 주님의 사랑을 나와 가족들에게 듬뿍 전했던 특별한 사랑의 전도사였다. 그를 추억하는 즐거움은 뭉클했다.
그의 사랑이 열매가 되어 우리 온 가족은 1977년 1월 9일 주일에 경향교회에 등록하게 되었다. 그의 사역을 이은 김옥순 권사의 사랑도 컸다. 그러니 두 노인의 사랑을 내가 잊지 못한다. 감사한 것은 김 권사가 은퇴 후 부산에서 살았기에 부산에서 강의를 마치고 자주 찾아뵈고 용돈도 드리면서 보은했었다.
아마 김 권사는 그래도 신재철 목사가 보은할 줄 아는 사람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를 아는 이로부터 종종 김 권사가 나에 대해 전한 말들을 들은 바가 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다. 나의 구원을 위해 멋지게 사용을 받은 사랑의 전도사와 전도인 권사를 기억하며 누구에게인가 나도 그런 목사로 남기를 바라고 있다. 진실하게 영혼을 사랑하며 후반기 목회의 사역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을 다지는 것이다.
손영자 선배는 당시 김형남 전도사가 나를 아끼니 같은 눈빛이었다. 내게는 마냥 선한 누이였다. 그런 누이를 늦게라도 만나게 되니 주님의 사랑이 크다. 주님의 은총이 손영자 사모에게 더욱 충만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