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감사
- 나의 목양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주어져 감사하면서 그 일부라도 나누며 독자들과 동역의 기쁨과 사명의 짐을 함께 하고 싶다.
기독교보는 고신교단의 문서선교를 담당하는 신문이다. 교단의 목사와 장로라면 최소한 이 신문을 통해 교단의 소식 등을 알고 기도함이 정당하다고 여긴다. 그간에 나의 저술을 소개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논문에 관계된 기고는 게재를 꺼리는 현상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균형을 상실한 면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아셨는지 이번에 연재로 기고할 기회를 허락받았다. 독자 마당에 ‘신재철 목사가 들려주는 목양 이야기’라는 코너를 만들어 3개월 동안 연재해달라는 것이다. 내년에 다른 주제로 약 1년을 연재할 예정이어서 그 효과를 위해 이번에는 12회 정도로 마치자고도 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나로서는 주님의 때가 되었다고 여겼다. 36년째 한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으니 기록 거리는 많을 것이다. 문제는 신문을 대하는 독자들과 공감하고 또 같은 값이면 교훈적이거나 감동이 남을 기록을 남김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첫 글의 제목을 세 가지 감사로 잡았다. 이 글은 기독교보 1527호 2023년 3월 18일 자에 게재되었다.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혹시라도 기독교보를 대하지 못하는 이들과 나누고자 목양 일기에 공개한다.
세 가지 감사
신재철 목사(초원교회)
목사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말을 자주 했고 들었다. 나의 경우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산다. 하나님께 감사, 이웃에게 감사이다. 특별히 세 가지를 감사하며 산다.
먼저 구원받은 일에 대한 감사이다. 성경과 굳이 교리를 언급하지 않아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고향은 18가구 정도가 사는 충남 연산하고도 산촌이다. 이런 곳에서 나의 부모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로 알려진 조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우암 송시열의 맥을 잇는다고 알려진 조부로 인해 조용한 시골집은 늘 유학을 논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어머니의 효성은 지금도 가슴에 새겨진 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조부의 친구 중 목사들이 많았다. 부친은 식자인 조부께서 일제 강점기에 지식인 친구들과 나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당시 지식인은 목사였다고 전한다. 후에 나의 전도를 받고 주님을 영접한 부친은 조부도 그 많은 목사와 교제했으니 반드시 전도를 받았고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마을에 한 노인이 교회에 다녔다. 적어도 십리 길 이상이어서 어린 나는 갈 수가 없었다. 그 노인을 따라 성탄절 등 교회 절기에만 갔을 정도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노인은 자기의 사랑방에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다. 어려서부터 친구들을 잘 이끈 나는 이 사랑방 모임에 사용을 받았다. 조부께서는 “예수는 안 믿어도 되지만 교회에 나가면 큰 인물이 됨에 좋다”며 교회 출석을 막지 않았다. 이렇게 나를 적신 어릴 적 복음이 주님을 영접하는 시작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내 생에 있어 최고의 감사 거리이다.
다음으로 목사가 된 일에 대한 감사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어머니는 시골에 계속 살면 4남매 자식들을 모두 오물 지게를 진 농사꾼으로 살게 할 것이라며 대전으로 이사했다. 이때 부친의 건강사정 등으로 곧 시골로 복귀할 것이라 여겨 유산이 없이 나오게 되어 엄청난 고생은 어린 나에게도 피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우리 가정의 출애굽이라 여겼다. 대전에 사니 집 근처의 교회에 출석할 수 있었고 중학교 때 서울로 전학하여 친구의 인도로 경향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이 교회의 목사를 통해 학습과 세례 그리고 결혼 주례와 목사안수까지 받았다.
이 교회에서 말씀을 깨닫고는 구원을 확신하고 영혼을 구령하고 양육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다. 이런 결심을 주신 성령님께서 환경적인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안수받은 것은 평생에 감사 거리가 되었다. 부모와 형제 특히 맏형이 전도를 받아 장로가 되었고 나의 역할을 통해 처가의 복음화에도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으로 무장된 목사로 사는 것에 대한 감사이다. 고려신학교에서 박형룡과 박윤선 박사의 가장 애제자로 알려진 박병식 목사를 통해 신학과 삶을 받았다. 그 후 이상규, 이복수 교수의 지도를 통해 신학석사로, 최은수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런 과정 중에 성숙한 목사로 나를 다듬었다. 이런 스승들의 일치된 신학 사상은 교회를 위한 봉사 신학의 강조였다.
이런 신앙과 신앙의 기초위에 1988년에 개척한 초원교회를 2023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36년째 담임하면서 목회하고 있다. 우리 교단 다른 교회의 집사이면서 학교 교사가 최근에 “목사님께서 불의한 교권에 도전하시고 교회 개척 후 숱한 고생을 한 것에 대해 존경합니다.”라는 안부에 글감을 생각했다.
교회를 개척하여 어려운 고난을 통과하면서 목양하였고 목사로서 신앙 양심을 지키는 일에 그 누구와도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은 것을 알고서 전한 격려였다. 부족한 목사로서 늘 주님의 저울에 나를 올려놓고 사는 가운데 나의 목양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주어져 감사하면서 그 일부라도 나누며 독자들과 동역의 기쁨과 사명의 짐을 함께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