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75회는 신학이 든든하니 개혁주의를 말로만 외치거나 주장하지 말고 희생과 섬김으로 감당하는 75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고려신학교 42회이다. 아들은 고려신학대학원 75회이다. 2001년에 내가 고신교단에 몸을 담으면서 아들은 자연스럽게 고신교단의 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마쳤다. 이런 이유에서 아들의 신학대학원 동기들을 상당수 안다. 아들이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기에 아는 것이다.
그중에 한 강도사는 선한교회에서 강도사로 사역했다. 이주민 선교를 목적하고 신학을 전공한 강도사다. 외국어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영어 구사도 자유로워 외국인 선교에 그만큼 다가선 강도사다. 실제로 국내에 있는 외국인들을 상대하면서 복음으로 이끄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이런 그가 선한교회에서 사역하면서 김종선 목사를 통한 훈련을 받았다.
김 강도사는 선한교회에서의 훈련과 받은 사랑이 자신의 향후 사역과 사명 감당에 큰 교훈이 되었다고 간증했다. 아들의 동기이자 나이가 아들보다 많은 이 강도사를 선한교회에 소개한 나로서는 후배를 잘 인도한 보람으로 가슴이 뿌듯하다.
이 강도사가 다른 지역으로 사역지를 이동하면서 그 후임으로 다른 강도사가 부임했다. 그 역시 아들의 동기로 동기 중에는 가장 나이가 많단다. 그 역시 중앙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여 중국에 살면서 회사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다.
이런 그가 다소 늦게 신학을 전공하고 선한교회에서 부 교역자로 사역하면서 자신의 미래 목회를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자신은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이 많다면서 배우는 자세로 선한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이 강도사와 김 목사와 함께 3월 4일 토요일에 시간을 내서 점심을 함께 먹었다. 김 목사는 자신이 대접한다고 했지만, 선배의 사랑을 피하는 처신은 나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김 목사와 강도사가 맛난 음식을 대했다며 감사를 표하였지만 커피까지 마시면서 대화는 이어졌다.
선한교회는 11주년을 넘긴 교회이다. 지하 예배당 시절 7년은 김 목사의 연단 기간이었다. 3층 상가예배당으로 이전한 때에는 바로 코로나 시국이었다. 이때 김 목사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한 성도들은 든든한 교회로 서갈 훈련을 잘 받았다.
그런 중에 김 목사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 공부를 하면서 성경을 해석하는 영적 시야를 넓히고 있다. 이날 김 목사는 자신의 학업성취에 자극과 도전을 준 나에게 크게 감사한다고 했다. 김 목사가 성경을 신학의 창으로 보는 훈련이 도가 높아짐에 내가 다 감사했다.
그러는 중에 예배당이 가득 찰 정도로 교회는 세워졌다. 김 목사는 전에 사역했던 강도사를 청해 3월 5일 주일에 설교를 들었다. 이때 전 교인들이 뜨거운 은혜를 체험했단다. 김 목사도 은혜의 폭이 깊었다면서 내게 간증했다. 현재 사역하고 있는 강도사에게도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신학과 그 인격이 든든한 바탕에 서 있다고 평가하면서다.
아들 강도사는 지난 2월 27일 월요일에 목사고시에 합격하고 4월 10일에 안수를 받는다. 하지만 앞의 두 동기는 아직 목사고시에 응하지 못하였다. 앞의 강도사는 미혼이기에 응시 자격을 얻지 못하였고 뒤의 강도사는 아직 여건이 마련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충실하게 준비를 잘하고 안수를 받으라고 주문했다. 서두르지 말라고 전한 것이다. 내가 목사안수를 받을 무렵에는 마음을 터놓고 지도해 줄 인사가 주변에 없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김 목사나 그 주변의 후배들이 나의 경험이나 교훈이 필요할 경우 주님의 나라 확장이란 즐거움을 기대하면서 임하고 있다.
고려신학교 42회는 자칭 최고의 인재들이라고 자평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셨다고 여긴다. 크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아들의 75회는 이와는 다른 기수가 되기를 바라고 기도까지 하고 있다. 신학이 든든하니 개혁주의를 말로만 외치거나 주장하지 말고 희생과 섬김으로 감당하는 75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42회는 서산에 기울고 75회는 동쪽의 산언저리에 걸린 해가 되니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