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목사가 담임목사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신앙 인격까지 영향을 받아 담임 목회에 임하게 된다면 담임목사로서 그에게 목회를 전수한 셈이 된다는 것이다.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조사와 교육전도사와 전도사의 경험이 있다. 전도사 신분으로 교회를 개척했기에 부 교역자로서의 강도사와 부목사의 경험은 없다. 하지만 전도사 때까지 강도사와 부목사들과 함께 사역을 감당했기에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살펴볼 기회는 있었다.
담임목사는 한 명이나 부 교역자는 교세에 따라 여럿을 둔다. 과거에는 담임목사가 부목사 등을 종처럼 여기고 부려 먹는 시대가 있었다. 한 유명한 목사가 부목사는 달걀이라고 했다. 실컷 부려 먹다가 마지막에 깨 먹는 존재란 것이다.
이런 기가 막힌 소리를 설교 강단에서 전하는데 성도들은 은혜를 받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감동 정도는 받았다. 역시 우리 목사는 훌륭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들의 눈에도 부 교역자는 소처럼 부지런하게 일을 하면 된다고만 생각한다.
그러니 신학교에 다니는 전도사들에게 1년은 학업을 쉬게하고는 교회에서 사역하게 하고 1년은 신학 공부를 하게 하는 기막힌 수를 두었다. 김종선 목사는 나보다 신학교를 17년이나 늦게 졸업했다. 그런데도 내가 경험했거나 본 바를 체험한 것처럼 말한다.
한 날 대화 중에 담임목사와 부 교역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소신 있게 밝혔다. 이를 들으면서 내가 가진 마음과 말을 그대로 전하고 있어 100% 이상의 동의를 표했다. 김 목사는 담임목사의 목회 중 대상에 대해 밝혔다.
목회대상이 성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부 교역자도 성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만 된다면 담임목사가 종처럼 일을 시키는 데만 주력하는 근시안적 목회가 아니고 장차 자신의 뒤를 이을 세대의 목회자로 양육하는 목회를 할 것이란 것이다.
부목사가 담임목사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신앙 인격까지 영향을 받아 담임 목회에 임하게 된다면 담임목사로서 그에게 목회를 전수한 셈이 된다는 것이다. 만일 부목사가 담임이 되어서 목회한다면 이는 그를 길러낸 목사의 열매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곳곳에서 담임목사와 부목사 간의 불화가 들려온다. 한국교회 송사 문제 연구소장직을 감당하다 보니 이런 분야에 들리는 소식은 비일비재하다. 36년째 목회하는 나에게도 피해가지는 않는 일이다. 기억에 남는 부목사들이 있다.
이정석 목사는 우리 교회에서 두 차례나 부목사 사역을 감당했다. 지금은 등대교회 담임목사이면서 부산외대에서 강의도 하고 있다. 그전에는 고신대학교와 여러 신학교에서 강의했다. 모두 내가 강의하면서 이 목사를 소개하여 어쩌면 내 뒤를 이은 사역을 감당하는 모습이었다.
이 목사는 그동안 학생들에게 나의 저술 등을 중심으로 읽도록 과제를 부여했다. 이 책들은 모두 내가 무료로 공급했다. 이번 학기에도 부산외대의 강의를 위해 두 과목의 교재를 전했다. 그만큼 관계 구축을 신뢰의 바탕 위에 한 것이다.
2002년부터 2011년까지 은급재단에 넣었던 연금을 해약하여 필리핀에 교민교회를 개척했다. 우리 교회의 부목사로 사역했던 박희경 목사가 주영광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이유다. 개척 후 수년 동안 최선을 다한 후원을 감당했다. 교회에서는 물론 대학 등의 강의에서 얻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전해 교민목회를 도왔다. 물론 선교한다는 심정을 가지고서다.
이 교회가 완전 자립을 하여 지금은 필리핀 현지 교회를 많이 후원하고 있다. 이때부터 나는 관심을 끊었다. 혹시라도 우리 교회와 내가 도움을 주었다는 자만심 등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이상철 목사도 열심히 있었던 부목사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덕스럽지 못한 기록을 남긴 부 교역자도 더러 있다.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이 덕스럽기에 그런 목사도 있다는 정도로 마치고 싶다. 김종선 목사의 말과 생각대로 그를 목회대상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나의 말을 당시에는 순종하는 듯했지만 결국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함이 드러났다. 아니 성령께서 포기하신 것이다.
나와 같이 기록을 잘 남기는 목사가 교회 합동 당시의 기록 특히 상대 목사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 중 하나다. 나는 교회 합동을 통해서 교회 건물을 얻었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는 채무를 다 안았기에 현재의 초원의 모든 가족의 공유이다. 건물도 채무도 모두이다. 채무의 최종책임은 목사에게 귀결됨을 안다.
그래도 합동을 통해 성도를 새로 만난 것이 행복이다. 교회 합동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새로 만난 성도 중 나의 귀한 동역자들이 스스로 교회 합동이 아니고 흡수통합이라고 평한다. 초원교회를 중심으로 흡수 통합되었다는 것이다.
제대로 인식한 신앙 양식의 결과라고 여긴다. 이런 성도들을 만난 것에 감사하게 여긴다. 때로 목사가 성도를 닮는 것이 복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귀한 성도들을 만났으니 목회가 얼마나 감사했을까? 그러나...
얼마 전에 부목사가 다른 교회로 갔다. 나와 교회의 장로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노회나 목사는 양자를 다 들어보고 판단해야 한다. 내 말이나 우리 교회의 주장만 들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부목사의 장래를 위해서 때로 함구하고도 있다. 담임이 되기까지는 훈련과정이니 담임목사의 목회대상이기 때문이다. 현재도 부목사이니 훈련을 더 잘 받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